
유적지
장철공 묘소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壯節公 申崇謙 將軍 墓域)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서면 신숭겸로 272-21
묘소 : 강원도 기념물 제21호
신도비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향사일 : 음력 3월 3일, 9월 9일
이 곳은 우리역사에 별과 같이 빛나는 충신 열사들의 으뜸인 고려태사 개국공신이며 평산신씨의 시조인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묘소로서 강원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21호이다.
장군은 태봉의 거장으로 있을 때 현경, 홍유, 복지겸들과 더불어 포악한 궁예를 내몰고 왕건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 하였다.장군은 그 뒤에 대장군이 되어 서기927년(태조10년) 가을에 태조를 따라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돕고자 후백제를 공격할 때, 대구 팔공산 싸움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태조를 숨기고 대신 싸우다 전사하셨다.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몹시 애통히 여겨, 그의 머리없는 시신을 찾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시)소양강 비방동에 예장했는데 1,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유서깊은 유적지로 널리 알려져 참배객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이 곳의 세 봉분은 장군이 전사할 때에 머리를 잃은지라 태조가 장군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서 엿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봉분을 셋으로 한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부인과 합장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제향때에는 중앙에서 행하고 있다.
출처 : 평산신씨대종중 웹사이트
표충사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신숭겸길17 (지묘동 526)
-종 목 : 대구광역시 기념물 1호
-향사일 : 한식일
이 곳은 우리 역사에 별과 같이 빛나는 충신 열사들의 으뜸인 고려태사(高麗太師) 개국공신(開國功臣) 장절공(壯節公) 신숭겸 장군이 순절(殉節)한 곳이다. 장군은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배현경(裵玄慶), 홍유, 복지겸 등과 모의하여 포악(暴惡)한 궁예(弓裔)를 내몰고 왕건(王建)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장군은 그 뒤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태조(太祖) 10년(927) 태조를 따라 국운이 기울어 가는 신라(新羅)를 돕고자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할 때, 대구(大邱) 팔공산(八公山) 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包圍)되어 태조가 위기(危機)에 빠지자, 그모습이 태조와 흡사함을 이용, 자신을 태조로 가장(假裝)하여, 태조를 숨기고 힘껏 싸우다. 대신(代身) 전사(戰死)하였다.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애통(哀痛)히 여겨 그의 머리없는 시신(屍身)을 찾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 : 지금의 춘천)에 예장(禮葬)한 후, 이곳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으고 지묘사(智妙寺)와, 미리사(美理寺)를 세워, 그의 영정(影幀)을 모시어 명복(冥福)을 빌게하고, 일품전지(一品田地) 삼백묘(三百畝 : 약 일만평)를 하사(下賜)하여 이를 수호(守護)하게 하였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유영순(柳永詢)이 폐사(廢寺)된 지묘사(智妙寺) 자리에 사당을지어 공(公)을 모시도록 하였으며, 현종(顯宗) 11년(1670)에 유림이 허물어진 사당을 "충렬사"로 중수하였다가, 조정(朝廷)에서 그 명후년(明後年)에 표충사(表忠祠)라 사액(賜額)을 내리어
일명 "표충서원(表忠書院)" 으로 불리어 관리하여 왔다. 고종(高宗) 8년(1871)에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표충서원이 훼철(毁撤)된 뒤로는 후손들이 순절단을 본거삼아 의지하고, 재사(齋舍)를 신축(新築)하여 제향을 모시며 지켜 왔다.
근래 후손들의 숙원(宿願)과 이 고장 사림(士林)의 여론(與論)에 따라,중앙 및 지방정부의 지원으로 표충사 중건사업(重建事業)을 일으켜, 1988년에 준공을 보아 1993년부터 공의 영정과 위패(位牌)를 다시 모시고, 해마다 한식(寒食)에 향사를 받들어 유적 성역화사업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
출처 : 평산신씨대종중 웹사이트
용산단

-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신숭겸로226(구룡리180)
- 전라남도 지방 문화재 기념물 56호
이 곳이 장절공의 탄생한 곳으로 고종 5년(1868)에 토지를 매입하고 광무 원년(1897)년에 유허비를 세우고 1929년에 단을 모아 용산단이라 하였다.
1960년 해방전후에 건립된 비각, 신숭겸 장군의 태를 묻었다는 단소(壇所), 용산재, 그리고 구룡문이 있다.
매년 9월 중정일(仲丁日) 다례를 행하고 있다
출처 : 평산신씨대종중 웹사이트
덕양서원

-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양서원길42(덕산리36)
- 전라남도 지방 문화재 기념물 제56호
덕양서원은 고려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선조 22년(1589년)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으로 정유재란때 모든 건물이 불타고 선조 36년(1603)에 신실이 중수되었으며 현종 6년(1665)이전의 서원 규모로 모두 중건되었다.
이후 1695년에 덕양이라는 사액을 받아 선현배양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철폐되었다가 1934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강당, 동재인 연서재와 신실인 덕양사, 서재인 신덕재, 전사청, 그리고 외삼문, 내삼문 등이 있다.
유적유물로는 덕양서원 건사사적비와 강당과 연서재의 내부현판 19개가 있으며 출생지인 용산재와 함께 도 지방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평산신씨대종중 웹사이트
율리사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율리에 있는 사당.
지정번호 : 충남문화재자료 제303호
지정연도 : 1988년 8월 30일
소재지 : 충남 서천군 비인면 성검로 287번길 16-1(율리 193)
시대 : 조선시대
분류 : 사묘재실
향사일 : 매년 음력 3월 중정일, 유림행사.
1851년 (철종2년) 건립
율리사는 고려시대의 명장 신숭겸(申崇謙)을 주벽으로 하여 申賢(13세, 신현), 申琿(14세, 신혼),申演(15세,대제학공파조 신연),申淇(15세, 온수감공파조 신기),申澈(23세, 온수감공파 신철),申澳(23세,온수감공파 신오) 등 평산신씨 7位를 배향한 사우로, 원래는 문중사우로서 1851년에 세덕사(世德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던 것이다. 당시는 신숭겸, 신철, 신오 등 3위를 제향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1900년(광무4)에 향중 유림의 공론으로 현재와 같은 사우로 발전 되었다.
이 사우와 관련된 평산 신씨가 비인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은 고려말 조선초기의 혼란기에 신용(申龍)이 이곳에 은둔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신용(申龍)은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들어갔던 온수감공파조 신기(申淇)의 아들로 그후 신철과 신오의 후손들이 함께 옮겨와 살게 되면서 그 문족들이 번창하게 되었다.
율리사의 발전과정은 우선 1850년(철종 1)에 비인의 사람들이 연명상언(聯名上言)을 통하여 평산신씨들은 이듬해인 1851년 2월 시조인 신숭겸을 주벽으로 하여 온수감공파의 23세손인 병조참판을 지낸 신철(申澈)과 승지를 지낸 신오(申澳)등 3인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세덕사라 칭하게 된다.
1900년(고종 광무8) 향중의 공론을 일으켜 위의 3위 외에 신혼(申琿), 신연(申演), 온수감(溫水監)파조 신기(申淇) 등을 추배하고 율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어 1918년에는 사우를 중건하고 1920년 고려시대의 학자로, 자는 신경(信敬)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신 신현(申賢)을 추배하여 모두 7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건물배치는 사우인 율리사가 내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의 방풍벽 맞배지붕이며 안에는 신숭겸을 주벽으로 모두 7위의 위패와 신숭겸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강당은 1967년 중수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강당옆에는 1929년 건립된 율리세덕사유허비(栗里世德祠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율리사는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303호로 지정되었다. 비인현 구지에 철종 때 건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래된 사당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평산신씨대종중 웹사이트